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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연애의 책

hallomean 2022. 10. 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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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책, 유진목

[책 소개]

선정위원, 출판사가 시인과 힘을 모아 시집 출간의 새로운 통로를 마련해보자는 취지인 만큼, 투고된 시들에 대해 곧바로 당락 결정을 하기보다는, 시인 한 명당 50~60편의 투고작 전체를 꼼꼼히 살피고 가능성이 돋보이는 시 원고에는 심사위원의 메모를 덧붙여 반송하고, 고쳐 온 시 원고를 다시 심사하는 수고를 들였다. 이 책은 그렇게 3년간 엄밀한 선정 과정을 거쳐 선정된 '삼인 시집선'의 1권이다.

 유진목의 시집 은 절제된 유머 감각이라 할 만한 것을 바탕에 두고 있다. 유진목 시인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웃음의 요소를 찾아내고 이를 시로 육화 하는 솜씨가 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세상에서 포획한 웃음의 요소들을 아무 데나 방목하지 않고 우리 삶 속의 어둠과 대면하는 자리에 조심스레 밀어 넣는 것이다.


[시인의 말]

당신이 죽고 난 뒤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거기에는 당신이 물건들이 놓여있다

어떤 것은 나대로 사용 할 것이고 어떤 것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끝내 찾지 못해서 방에 앉아 울었다

내가 죽고 난 뒤로 방은 완전히 비어 있다

이 책은 돌아와 마저 쓰인 것이다

-유진목


[본문 중]

<접몽>

빈 방에서 사랑을 했는데

당신은 어느덧 살림이 되고

 

나는 봉지처럼 느슨하게 묶여서

서랍에 들어 있길 좋아한다

 

움켜 쥔 창틀 쪽에서

매일 밤 돌아오지 않는 꿈을 꾼다

 

나는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것보다 

그게 더 슬펐다

 

배꼽에 흐르던 당신의 일들

 

내게서 당신이 가정 멀리 흐를 때

나는 오래 덮은 이불 냄새

 

우리는 닫힌 채로 집을 나왔다

 


<당신의 죽음>

1. 내가 꿈꾸던 영혼이 온다 나무가 부는 바람을 타고 먼 데서 오고 있다 발가벗고 바람 목욕하러 가자 그는 잠든 지 오래 꿈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 그가 뒤척이는 것은 꿈의 체위를 바꾸기 위해서다 나는 몸을 열고 그를 흔들어본다 일어나, 그를 관통하던 물길이 꿈에 사로잡혀 불길하다 바람난 사내처럼 냉정한 물길이다 하여 심장을 둘러싼 나뭇가지는 메마른 지 오래 나뭇잎이 뚝 뚝 뚝 떨어진다

2. 그의 심장으로부터 가을이 왔다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어둠을 펼치고 이제 그는 내가 모르는 체위로 사랑을 한다 나는 앙상해진 심장 가까이 나침반을 대어 본다 침묵이 극점을 향해 기우는 때 일어나, 나뭇잎 하나 없는 심장이 무엇에  흔들릴 수 있겠니, 바람이야, 바람이 우리를 보고 있어, 먼 길 펄럭이는 바람을 타고 나뭇잎 묻은 영혼이 온다 바람 부는 언덕으로 나뭇잎 따러 가자


[읽은 후,]

유진목의 시를 읽으면 청승도 재주요, 솔직한 것도 재주요, 뻘하게 웃기는 것도 재주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하며 느끼는 총천연색의 기분이 <연애의 책>한 권으로 모조리 느껴진다. 떠나려는 사람은 어떻게든 떠난다. 아무리 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언제 머물렀나 싶을 정도로 지나가버리는 짧은 가을처럼. 그 차갑고 건조한 마음을 가을로 표현하고 바삭한 낙엽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토록 가을은, 곧 갈 거라 가을이고 시린 마음을 가을 탄다고 하는 것일까. 너무나 가까워진 상대를 살림이라 칭하고, 나를 느슨한 봉지로 표현하며 설렘은 없지만 너무나 익숙해진 서로가 서로에게 곧 헤어짐이 닥칠 것을 상상하며 진짜로 떠나버린 상황이 오는 것보다 그 상상을 더 두려워한다.  가장 가까이 배꼽을 마주했던 당신. 당신 마음에서 죽어버린 나를, 그리고 내 마음에서도 곧 죽어버릴 당신을 우리는 서로 어떤 방식으로 애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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