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끄러움
[작가 소개]
이례적으로 책소개의 순서를 바꿔보려 한다.
이번에 소개될 책은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기 때문.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1940년 프랑스 르아브르 인근의 작은 공업도시 릴본에서 식품 겸 식당을 운영하는 뒤셴느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974년 사외적 소외감을 독특한 문체로 표현한 소설 <빈 장롱>으로 데뷔했다. 1983년, 네 번째 소설 <남자의 자리>에서 개인적 경험을 사회학적 관점으로 예리하게 해부한 혁신적인 스타일을 인정받아 르노도 상을 수상했다. 이때 작가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자신이 쓴 작품들과 쓸 작품에 일찌감치 '자전적'요소를 부여했다. 작품들의 면면들을 살펴보면, 첫 경험 <소녀의 기억>, 사춘기 <그들이 말한 것, 혹은 말하지 않은 것>, 결혼<얼어붙은 여자>, 낙태<사건>, 유부남과의 연애<단순한 열정>,유방암 투병<사진의 용도>, 어머니의 알츠하이머 투병<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와 어머니의 죽음<한 여자>등 인생의 궤적이 가감없이 담겨 있다. <부끄러움>은 가난한 노동계급으로서의 부모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고급스러운 기독교 사립학교를 오가며 보낸 유년 시절로 이어지며 내면 깊이 자리한 수치심을 응시한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는 문학사상 가장 충격적인 첫 문장 중 하나로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는데, 이 사건은 작가에게도 반드시 한 번은 말해야 하는 근간이자 '원체험'이었다. 작가는 <부끄러움>으로 자신의 치부를 열어 보이고, 보다 자유로운 글쓰기로 한발 나아갔다. 자전적, 전기적, 사회학적 글이라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로 '칼 같은 글쓰기'라는 수식어를 얻은 작가는 마그리트 뒤라스 문학상(2008), 프랑수와 모리아크 문학상(2008), 마그리트 유르스나스 문학상(2017)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또한, 생존작가로는 이례적으로 2003년 작가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파격적인 문체로 문제적 작가로 불려진 그녀는 올 해 2022년 그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녀는 수상대에 올라 여성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겠다고 한다. 또한 좋은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는 우선 다독할 것, 그리고 글을 잘 쓰려고 애쓰기 보다는 정직하게 쓰기를 권유한다고 말했다.
[책 소개]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 이 책은 감정의 해부학이라는 점에서 그간의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과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성숙한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탐구의 자리를 부모와 고향의 회상이 대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자의 자리><한 여자>등의 세계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철칙 하에 소설과 자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작품을 선보여온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전략과 관련하여 이야기하자면, <부끄러움>은 그녀의 과거와 그로부터의 이탈 이후의 삶이 교차하는 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계급'은 아니 에르노의 영원한 테마에 가까운데 '부끄러움'은 이 계급이라는 추상의 가장 생생하고도 구체적인 원초적 감정의 일단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에 따르면 계급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계급은 '우리 동네'와 그 너머의 '저곳'을 가르는 경계선이자 '우리 동네 사람'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기준 같은 것이다. 같은 계급에 속한다는 것은 같은 세상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의 말]
내게 글쓰기는 헌신이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글 쓰기가 없다면, 실존은 공허하다.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본문 중]
음식을 낭비하지 않고 만끽하는 방법: 소스를 먹기 위해 접시 옆에 작은 빵조각을 미리 준비할 것. 너무 뜨거운 퓌레는 가장자리부터 먹거나 후후 불어가며 먹을 것. 남아있는 수프까지 긁어먹으려면 접시를 기울여 숟가락으로 퍼먹고, 아니면 두 손으로 들고 마실 것.
물을 낭비하지 않고 몸을 깨끗이 하는 법: 이를 닦고, 얼굴, 손, 그리고 여름철에는 발까지 닦는 데 한 대야의 물만 쓸 것. 무엇보다 때 묻은 옷을 그대로 입을 것.(63p)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사교성이었다. 단순 솔직하고 공손해야 했다. '응큼한'아이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노동자들은 타인과의 대화에서 지켜야 할 정당한 법칙을 위반한 사람이었다. 고독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칫 '곰'으로 취급될 정도로 무시당했다. (노총각, 노처녀에 대한 경멸로서) 혼자 살려고 하거나,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그 사람은 꼭 야만인처럼 살잖아!라는 말을 듣게 되며, 인간의 존엄성에 해당하는 무엇인가를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즉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과시하는 것이었다. 즉 관습에서 벗어나는 짓이었다. 그러나 이웃이나 친구 집에 너무 자주 집요하게 드나들거나 어떤 여자나 남자 집에 항상 '죽치고 있는 것'역시 질책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자존심의 결여였다. (... 중략) 남들처럼 살자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자 성취해야 할 이상이었다. 개성은 일탈, 심지어 조금 미친것 같은 증세로 간주되었다. 동네 개들 이름조차도 하나같이 '미케'나 '보비'였다.(72-74p)
[읽은 후,]
이번 주말, 친한 언니의 고백을 들었다. 절연한 지 오래된 부모님을 뵈러 갔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 고백이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개를 잡는 장면을 보았다는 언니. 언니는 불편하고 끔찍한 그 장면을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직시했다고 했다. 언니의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몽둥이질하고 있는 남자, 침을 질질 흘리며 몽둥이를 맞고 있는 개. 그리고 그들을 빙 둘러싼 관중들은 '어떻게 해 불쌍하다' 혹은 '더 세게 패야 육질이 연해져!'라며 한 마디씩 거드는 장면.
언니는 그 장면에서 자신을 봤다고 했다. 목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질문이 많았던 그녀가 항상 불편하셨나 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했는지, 어떻게 며칠 동안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 수 있었는지 어릴 적 그녀는 그 정도의 질문을 던졌겠지만 하나님의 목자인 아버지는 왜 그녀의 질문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구타를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입에 까만 테이프를 붙여두고 잘못했다고 할때까지 때릴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녀가 참담했던 이유는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맞는게 부끄러워서도 엄마가 퍼붓는 야유(쟤는 더 맞아야 해!)가 야속해서도 아니었고, 마을 둔치에서 잡히던 개의 모습이 생각나서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지금 당장 '잘못했어요!'라고 말하고 싶은데 자신의 입에 붙은 검은 테이프 때문에 아무말 못하고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 때문이었다고...
그 이야기를 언니는 천천히 부모님 앞에서 고백했다고 한다. 늙고 힘이 없어진 그녀의 부모님은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아이고...' '허이고...' 하시며 애꿎은 자신의 무릎을 탁탁 치셨다고. 언니는 그들 앞에서 울지도 않고 이제는 그 일들이 꿈이었는지, 자신의 환상이었는지 구분이 잘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친한 언니의 고백처럼 고독하고 건조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글이었다. 자신이 받은 상처에 감정적인 폭발보다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있는지를 고찰하는 방식의 글쓰기는 그래서 더 슬프다. 나는 오늘 책장을 덮고, 아니 에르노의 문단을 그 언니에게 위로랍시고 전송했다.
"이 모든 게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 회상도 하나의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