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태도가 작품이 될 때
[책 소개]
미술가 박보나의 첫 예술 에세이로, 동시대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을, 특히 그들이 세상과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를 사려 깊게 읽어낸 책이다. 박보나는 세상을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미술가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면서 그들의 윤리적 상상력, 그것이 작품이 될 때 우리는 그 상상력을 하나의 태도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박보나라는 미술가가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세상을 읽으려고 한 시도가 담겨 있다. 책에 나오는 작가들은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업을 통해, 일반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작가의 말]
이 글들을 썼던 2016년과 2017년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블랙리스트를 비롯한 문화체육계의 특혜와 비리가 드러났으며,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된 어둠의 시기였다. 동시에 촛불 시위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함께 꿈꿨던 빛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일부 글들은 당시 암울한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의견을 담고 있으며, 또 다른 글들은 중심과 주변, 아래와 위, 원래의 위치와 익숙한 매체가 바뀌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생각을 포함한다. 이 글들은 나의 태도이다.
[본문 중]
<놀고, 떨어지고, 사라지려는 의지> 바스 얀 아더르
바스 얀 아더르 (Bas Jan Ader, 1942~1975년 사라짐)는 1970년대에 미국에서 활동한 네덜란드 출신의 미술가다.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는 아더르가 비디오와 사진 그리고 친구들에게 보낸 엽서로 구성한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우는 얼굴을 사진이나 엽서로 보내거나 3분이 넘는 비디오로 만들었는데, 왜 우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저 서럽게 울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같이 슬퍼진다. 같이 울고 싶어 진다.(중략...)
아더르의 작업을 자유의지의 관점에서 읽으면, 그의 울음 또한 작가 자신의 실존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누군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왜 예술을 하는지, 어떤 태도로 작품에 임하고 살아갈지 등 자신의 본질을 진심으로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아더르의 흐느낌은 세상의 규칙과 속도와 상관없이 '떨어지고 사라지기'로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과 자신의 실존을 표현한 것이리라.
<더 시끄럽게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바이런 킴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어이없이 강도를 당한 적이 있다. 다행히 용의자가 붙잡혀서 재판에 나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게 되었다. 강도가 흑인이었다는 내 증언에 용의자 측 변호사는 "어떤 피부색의 흑인이었나요?"라고 물었다. 흑인이라는 표현이 이미 특정한 피부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변호사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검은색이었다니까요, 그냥 흑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흑인도 커피 갈색, 옅은 갈색, 진한 검은색, 푸른 검은색, 혹은 회색에 가까운 검은색 등 피부색이 다양하다고 말하면서 '그냥 흑인'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에서 온 내가 흑인에 대해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범인이 흑인이었다는 내 증언이 유효하지 않다는 반론을 펼쳤다. 다행히 그 변호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나에게 매우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바이런 킴(Byron Kim,1961~)의 <제유법 Synecdoche>은 항상 나에게 이 부끄러운 순간을 선명하게 상기시킨다. 바이런 킴은 한국계 미술가로, 단순한 색으로 미니멀하게 캔버스를 채우는 회화 작업을 주로 해왔다. 바이런 킴의 도전은 자신의 문화 정체성, 존재에 대한 탐구 속에서 더욱 확장된다. 바이런 킴이 1991년부터 그린 <제유법>은 그의 회화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가로 25.4센티미터, 세로 20.3센티미터 크기의 판 수백 개로 구성되었다. 하나의 판이 한 가지 톤의 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모든 판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 언뜻 보면 비슷한 색으로 구성된 모노크롬 회화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그냥 색이 아니다. 이 색들은 작가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 작가가 재현해낸 그들의 피부색이다.(... 중략) 모든 사람은 각각 다르다는 게 유일한 공통점이라는 것. 따라서 그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같이 살 수 있다는 것. 그래야 사랑할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읽고,]
이 책을 마주한 건, 책의 표지 때문이었다. 울고 있는 남자의 얼굴. 그 얼굴이 서가에서 책을 꺼내 든 순간 나도 울고 싶어 지게 했다. 미술작품, 예술을 이해하는 것은 작가의 서사없이 불가능하다. 나만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발돋움하여 그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작품을 보고 상상된 어느 감정들은 큐레이터들을 통해 조금 더 실체화되고 그 작가의 생애와 가치관을 알게 되면 그들이 남긴 작품의 의의를 면밀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옆의 사진은 실제 내가 대구미술관에서 직관한 바이런 킴의 <일요일 그림>이다. 그의 <제유법>처럼 <일요일 그림>도 파란 일요일 하늘, 조금 회색인 일요일 하늘, 분홍색의 일요일 하늘, 푸르고 붉은 일요일의 하늘이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게 쭉 전시되어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의 작품은 내가 여태 내 눈으로 찍어온 하늘을 한데 모아 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감동적이었다.
박보나의 글들은 다루고 있는 예술작품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삶의 태도 방식과 자신이 그 작품을 대면했을 때의 감정을 독자에게 고백하듯 말해준다. 나는 그녀의 말하기가 좋아 그녀와 개인적으로 친해져 직접 작품 큐레이팅을 듣고 싶다는 웃기는 바람을 꿈꿔본다. 오늘 밤엔 그녀와 손을 잡고 미술관을 도는 꿈을 꿔야지. 그녀와 와인을 가운데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배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