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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hallomean 2022. 10. 12.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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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김개미

[책 소개]

문학동네 시인선 91권. 김개미 시집. 시집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본격적으로 시를 읽기 전에 각 부의 머리말이 되어준 소제목부터 먼저 읽어보십사 당부를 드리고 싶은 까닭은 ‘울면서도 웃었어’, ‘우선 좀 혼탁해져야겠다’, ‘소리에도 베인다는 말’에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가 그득 배어 있는 탓이다. 사실 이 시집은 손에 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술술 읽어 넘길 수 있는 그런 유의 시집은 아니다. 한 편 한 편 한 연 한 연 한 문장 한 문장이 아프기 때문이다. 짙기 때문이다. 질기기 때문이다. 상처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재 진행형의 ‘나’이며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완벽하게 새로운 스타일의 사랑 시집으로 읽혀도 좋으리라. 

 

[시인의 말]

흉곽을 뜯고 들어와 심장을 갈가리 찢어먹는 사랑스러운 파괴자 H. 당신 소원대로 나는 미쳐가고 있어. 부디, 나의 불면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기를. 악마의 유전자를 가진 당신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17년 봄, 김개미

 

[본문 중]

<은밀한 장난> p.65

새의 부리 같은 백합의 봉오리가 벌어지면 우리는 손을 잡고 아라비아 도둑처럼 살금살금 뒤란으로 갔다. 숨도 쉬지 않고 백합 안에 손모가지를 집어넣었다. 우리가 훔쳐낸 것은 흰 백합의 붉은 수술. 막 초승달이 떠오르는 우리의 손톱은 물이 잘 들었다.

 가슴에 봉오리가 앉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아직 난쟁이였다. 백합은 커서 우리보다 훨씬 커서 우리는 백합을 나무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무 그늘에서 공기놀이를 했다. 땅따먹기를 했다. 가끔 가슴에 손을 넣고 싹이 움트는지 확인했다. 오래오래 오줌을 누었다.

 벌들은 끝없이 우리의 귓속에 진동음을 털어넣고 칡넝쿨은 우리의 머릿속을 헝클어놓았다. 우리는 바위에 앉아 간지럼을 태웠다. 바람 말고는 들어간 적 없는 곳을 들락거리는 우리의 손. 얼굴이 벌게지면 고개를 떨구고 제비꽃을 따서 반지를 만들었다.


<그 밤> p.14

그 날 / 마당에서 주전자가 굴렀어 / 천장에서 그림자가 춤췄어/ 숨차지 않았어

그 날 / 무를 먹고 있었어 / 내 머리통을 날려버릴 무를 / 피하지 않았어

그 날 / 누군가의 손이 내 눈을 눌렀어 / 미어터지는 빛줄기가 예뻤어 / 울면서도 웃었어

그 날 / 아빠 눈알이 뱅글뱅글 돌았어 / 엄마가 눈물 속으로 도망쳤어 / 나를 데려가지 않았어

그 날 / 들깨밭에서 목침을 주웠어 / 도랑에서 시계를 건졌어 / 고장 나지 않았어

그 날 / 치마가 찢어졌어 / 발등에 감자만한 혹이 났어 / 아프지 않았어

그 날 / 할머니가 문지방에 낮아 졸았어 / 이웃 사람이 입을 벌리고 있었어 /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 날 / 내가 쥐고 있던 별이 죽었어 / 내 손가락을 잘랐어 / 아무도 몰랐어 

 

[읽고, ]

김개미의 시는 오묘하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투로 고통을 덤덤히 말하는가 하면 아이의 말투로 짙은 애무와 사랑을 읊조린다. 

<은밀한 장난>은 사랑을 시작한 관계의 농밀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목에서 명시한 것처럼 그 애정 어린 마음은 은밀한 장난으로, 그들의 사랑이 닳지 않은 풋풋한 첫사랑의 느낌을 준다. 실제 백합의 꽃말은 '순수한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으로 치환된 백합은 어른의 감정을 상징하며 아직 난쟁이였던(어렸던) 자신들은 그 사랑(백합)이 너무나 크게 느껴져  나무로 불렀다. 그들은  그 밑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땅따먹기를 하고 서로의 사랑을 들춰보며 간지러운 마음에 오줌을 누었으리라. 어린 마음에 사랑은 곁가지들에 흔들린다.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지 의문이고 주변에서는 너희 오래 못 간다고 으름장을 늘어놓기도 하여 언제나 불안하다. 하지만 우리는 은밀하게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제비꽃으로 반지를 만든다. 제비꽃의 꽃말은 '사랑'이다. '순수한 사랑'에서 그들은 형용사를 뺀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다. 

은밀한 장난은, 그들의 사랑 놀이이다. 

<그 밤>에서는 또 어떠한가. 무력한 아이 앞에 벌어진 폭력의 순간들을 담담히 말한다. 그 담담함에 너무나 가엽고 슬퍼진다. '울면서도 웃었다'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은 어떤 상징일까. 이 무력감은 방관하고 있는 어른들의 시선에서도 이어진다. 폭력의 시간을 침묵하고 방관하는 어른들. 도망간 엄마. 시간은 흘러 아이는 나이를 먹지만 이 시간에서 벗어날 순 없다. 별이 죽었다는 아이의 말은 마음의 희망을 잃어버린 듯하고 손가락이 잘랐고 아무도 몰랐다고 말하는 아이는 불구가 돼버린 자신의 마음을 아무도 모른다고 자신의 상처를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을 말한다. 

김개미는 밝음과 어둠을 번갈아가며 끝까지 이해하고자 하는 안간힘을 보인다. 그 덕에  나 조차도 이 가슴아린 글 들을 안간힘을 쓰고 보게 하는 것이다. 오래도록 아프지만 이 글들은 나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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