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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늘 같이 있어

hallomean 2022. 10. 13.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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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이 있어, 박상수

[책 소개]
문학동네시인선 109권. 박상수 시집. 2006년 첫 시집 <후르츠 캔디 버스>, 2013년 두 번째 시집 <숙녀의 기분> 이후 오 년 만에 선보이는 세 번째 시집이다. 평론집 <귀족 예절론>,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를 출간하며 현장 비평의 최전선에서 한국 시를 조망하는 연구자-비평가로도 간단없이 활동 중인 박상수. 그에게 비평과 시작(詩作)이 별개의 작업은 아닐 것이나, 그의 시 속에서 우리는 한결 더 자유롭고, 과감하고, 풍부한 감정과 목소리로 말하는 시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여일 하게 날카롭고, 다정하고, 재미있다. 시집 <오늘 같이 있어>는 "일상과 아름다움의 단짠단짠 레시피"라는 해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짠내 나는 일상의 희극" 그리고 "달콤하고 아름다운 일인극",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의 말]

우린 너무 아름다워서 꼭 껴안고 살아가야 해.

-2018년 초가을, 박상수

 

[본문 중]

<습관성 무책임>

나만 버리고 나갔으면, 그러면 됐지, 왜 전화를 해?

 아파 쓰러졌다니까, 니가 119에 실려갔다니까, 할 수 없이 왔지 이 새벽에 콜까지 불러서 이십 분 만에 왔어

 넌 누워있었지 나를 보자마자 수도꼭지를 틀어버렸어 한 번 틀면 안 잠기는 애인데, 네 눈이랑 입에서 쏟아지는 거, 그거 우산이끼랑 썩은 해파리 섞인 거...... 곧 애를 낳을 것처럼 내 품에 안겨서는 엉엉 홍삼 진액 같은 걸 쏟아댔어

 보호자분 오셨으면 수납부터 하고 방사선과로 가세요

버스 카드 단말기 일까, 당직 간호사 언니, 삑삑삑 내뱉더니 너보다 더 세게 우는 주정뱅이 붕대 아저씨한테 가버렸지 내가 너의 보호자라니!! 따질 겨를이 없었어 사진을 찍고, 너를 다시 눕혔지 오빠는? 너 오빠랑 나갔었잖아? 물었더니 자꾸만 더 수도꼭지를 틀었지

 빅토리아 시크릿, 그거 니 거, 서랍 속에 니가 고이 모셔뒀던 거...... 넌 앞으로 육 개월은 살 빼야 입을 수 있던 거(미안), 그거까지 훔쳐 입고(미안) 나갔는데, 아, 갈비뼈에 금이라니...... 오빠가, 오빠가......

뭐? 설마...... 설마?!

수정아! 수정아!!

니네 오빠가 응급실로 달려들어왔지 네가 비명을 지르고, 어디서 이런 캐릭터가 나타난 걸까, 잘못했어, 이 오빠가 무조건 잘못했어! 니네 오빠는 너한테 달려들었지 무릎을 꿇고 바닥에서 난리를 쳤어 넌 침대에 서서 맞받았지, 제발 가, 여기가 어딘데 왔어? 이를 깨물고, 떨면서는 난리를 쳤어 머리에 링거를 꽂은 옆 침대 애기가 뒤로 넘어가고, 간호사랑 경비 아저씨들이 닥쳐들고 

 그동안 죄만 짓고 살았어 모두에게, 모두에게!! 넌 알지? 수정이 친구니까. 넌 알지?

병원 구석 벤치에 앉아서도 니네 오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 너를 영원히 기다리겠대 '뭐 막상 또 보니까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데......'라고 생각해줘야 할까

 하도 징징대서 오빠 어깨를 두 번만 토닥여줬지 이제 너, 자수하는 게 나을 텐데...... 오빠는 슬쩍 고개를 들었어 물이 나올락 말락 옴찔대는, 은빛 샤워기 눈빛, 아 이런, 보안등 밑에서 풀벌레 소리랑 오빠랑 앉아 있으려니 니네 오빠의 마음이 아무렇게나 뻗쳐대고

 슬쩍 니네 오빠가 내 손을 잡아왔지

너를 버릴까 니네 오빠를 버릴까 고민을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어쩜 이 말도 못할 생식샘의 노예 종자 녀석을 어떻게 하나.

 

[읽고,]

박상수의 시를 읽는데 왜 홍상수 영화를 본 것 같지?

전체적인 그의 시를 읽으면 일상의 꽁트를 보는 것 같다. 웃기고, 찌질한데, 짠하다. 

그의 시구 안에 내가 이 시들을 읽은 감상평들이 줄줄이 엮여있다. 한 번 나열해 보자면, 이런 것.

-마음, 그건 어디 있는 건가요(p.12, 외동딸)

-사랑이라면 박수를 쳐주겠지만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p.68, 이해심)

-다 드셨으면 치워드릴게요(p.19, 일대일 컨설팅)

-나한테 왜 이래?(p.42, 오작동)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p.96, 살 마음)

홍상수만큼 박상수 너무 좋아졌다... 노란 책 표지만 봐도 영화 '우리 선희'가 생각나는 거 보면 중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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