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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hallomean 2022. 10.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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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힘겨운 오늘을 지우고 ‘옛날’과 ‘훗날’만 남아 별처럼 반짝이는 삶

1995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와 올해로 등단 24년을 맞은 시인 윤병무의 세 번째 시집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529번으로 출간되었다. 일상의 서정이 차곡차곡 쌓인 전작 『고단』에서 드러났던 고단하고 비루한 삶의 하중과 슬픔은 그대로 이어지지만, 이번 시집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에 이르러 시인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삶이 정말 고단한 것일까?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두 개의 소제목 아래 나누어진 58편의 시편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인의 말]

빚꾸러기가 되어 주야장천 걸었다. 맨 정신으로는 산문을 걸었고, 제정신으로는 시를 걸었다.

당신을 갚을 날이 아주 멀지 않길.

-2019년 늦봄, 윤병무

 

[본문 중]

<-ㄴ지 모르겠어>

어쩌면 우리는 이미 사라진 태양계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득한 별이 수명을 다하기 일만 년 전

이만 광년을 내달려와 우리에게 별빛으로 존재하듯

우리는 한때 지구라는 행성에서 밤하늘을 노래할 줄 알았던 직립보행 생물이었는지 모르겠어

공간이 시간을 떠날 수 없듯

시간이 공간을 지울 수 없어서 우리는 

당시 생생했던 날들을 재생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때 그곳에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바다가 있었고

그럴거면 아예 끝장내라고 목 놓다가 이젠 운명을 치워달라며 무릎 꿇었다가 모래톱에 쓴 이름 삼킨 파도를 응당하다가

혼잣말 발자국만 남기고 떠났던 겨울바다 

길고 혹독한 빙결만 차곡차곡 쌓여

끝내 세상이 얼어붙었던 대사건이 있기 전의 현장을 우리는 당장인 줄 알고 살아내는지 모르겠어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불행이 걸어간 시절에 슬픈 옛사람이 꾸었던 악몽의 등장인물인지 모르겠어

질려 소리친 가위를 흔들어 깨운 손에 이끌려

불쑥 무대 뒤로 퇴장한 건지 모르겠어

여명에만 꺼지는 무대조명- 서녘 달빛이, 무릎으로 세운 홑이불 산맥에 그림자 드리워

흉몽의 능선을 조감도로 보여주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얀 히말라야에 파묻은 얼굴인지 모르겠어

 

웬 목맨 귀신이 떠났던 대들보 찾아오는 소리냐며 후려치는 바람에 얼얼한 뺨이 벌게져도

손자국은 백 년 후 겨울날 홍시인지 모르겠어

앙상한 당신의 이름을 머리에 이고 겨울이 닳도록 탑돌이 하는지 모르겠어

당신과 나의 시간이 엇갈려 지나가도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정한 지 오래 

나는 당신의 이름에 집 지은 지 오래 

빗장 건 대문에 얼비친 얼굴이 바로 당신이자 나인지 모르겠어

잡풀 웃자란 마당이 무심한 자손의 묘소인지 모르겠어

행인이 서성이던 자리의 족음이 당신인지 모르겠어

새끼 기린을 뒤따른 바람이 나인지 모르겠어

당신인 줄 알고 밤길에 잘못 부른 이름인지 모르겠어

 

당신을 고인 물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여름을 보았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달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그믐을 울었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사자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포효를 들었는지 모르겠어

나를 구렁이라 명명한 이는 나의 허물을 주웠는지 모르겠어

시간의 개울을 건너본 이들은 우리를 살아보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버릴 시간의 돌다리에서 

굽이치는 물결을 만진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살음을 人이라 하지  않고 人生이라 하는지 모르겠어 

 

[읽고, ]

죽어버린 별들의 빛들이 이제야 지구에 도착해 우리의 위에 반짝인다. 내가 보는 빛은 아마도 까마득한 시간 전에 소멸한 별들의 삶을 보는 것. 분명 과거의 빛인데 나는 현재에서 그걸 보고 있다. 우리의 과거도 그렇지 않을까. 지나고 나서야 그 빛이 내게 와닿는 순간들이 있음을 깨닫는다.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은 별을 가리켜 밤하늘의 유령이라고 했다지. 우리의 힘들었던, 그러나 오래전으로 사라져 과거의 어느 순간의 삶이 이후의 삶에선 빛으로 반짝일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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