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사랑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을 시작하고 엇갈리고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어쩌면 더없이 평범해 보이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근원과 속성, 그리고 그 위대한 위력을 성찰한다. 이승우는 '특별한 사람들의 별스러운 사랑 이야기'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험을 할 때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현상을 탐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오랫동안 사랑에 관한 순간의 단상들을 떠오르는 대로 메모해온 작가의 기록들에서 탄생했는데, 그동안 이승우가 신과 인간, 구원과 초월, 원죄와 죄의식, 삶과 욕망과 부조리 등 심오하고 무거운 주제에 천착해왔다면, 이번에는 인간에게 가장 내밀하고도 원초적인, 그러나 또 그만큼 낯설고도 모순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했다. 작가 특유의 문학적 현미경과 철학적 통찰력을 통해 집요하게 관찰되는 사랑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사건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되어 당혹하고 혼란스러워본 적 있는 독자들에게 사랑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유하도록 도와준다.
[작가의 말]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현상들을 탐사하는데 할애된 이 소설은 떠오르는 대로 순간의 단상을 적어둔 여러 개의 내 메모들에서 탄생했다. 메모들은 여러 권의 몰스킨 수첩을 거쳐 스마트폰의 메모장으로 옮겨 왔다. 소설에 붙은 소제목들은 메모장에 있는 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특별한 사람들의 별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지어내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경험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보고서를 쓴다는 것이 이 소설을 쓸 때의 작의라면 작의였다.
사랑 경험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비슷하고, 비슷하지만 다 다르다. 내 현미경의 배율이 적당한지, 혹 불필요하게 높거나 지나치게 낮아서 그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현상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가 없지 않지만, 배율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보이는 것이 마땅한 이 경험의 신비를 확인해보는 것도 소득이라고 스스로 안위한다. 제목은,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일 뿐이고, 사랑이 그 안에서 제 목숨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사랑의 생애'라고 했다.
- 2017년 2월, 이승우
[본문 중]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마치 물이나 수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면 누군가 파놓은 함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난 사랑에 빠졌어,라고 말한다. 사랑이 사람이 빠지거나 잠길 수 있는 것인 양 물화시켜 말하는 이런 수사는 사랑의 불가항력적 성격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딘가에 빠진 사람은 무력하다는 인식이 이 문장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이 어디든, 어딘가에 빠진 사람은 그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인다. 가령 수렁에 빠진 사람은 거기에 빠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빠지고, 외부에서 누군가 건져주지 않으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불가항력적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주어는 '나'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나'이다. 흐릿하고 희미하지만 '나'가 주어이다. 나는...... 에 '빠졌다'. 그래서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난처하고 곤란하다. 어쨌든 빠진 사람은 '나'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에 빠졌다. 그러므로 거기서 빠져나오기도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성격의 사랑을 거부하려는 무의식이 이 희미한 주어, '나'를 고수하게 한다. 빠진 사람이 나이므로 빠져나올 사람도 나라는 생각은 돌연히 들이닥친 사랑의 사건 앞에서 주체가 겪는 당황과 불안과 무기력을 몰아내기 위해, 혹은 회피하기 위해 구사하는 일종의 기교 같은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 기교는 거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사람이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빠질 사랑의 웅덩이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이 들어와 사는 것이다.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하는 이치이다. 물론 기생체의 선택을 유도하는, 기생체의 마음에 들 만한 숙주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언급할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 선택이 숙주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숙주는 자기 몸 안으로 기생체가 들어올 때는 물론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어떤 주체적인 역할도 하지 않거나 못한다. 숙주는 기생체가 욕망하고 주문하는 것을 욕망하고 주문한다. 자기 욕망이고 자기 주문인 것처럼 욕망하고 주문한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전에는 하지 않거나 할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을 사랑의 숙주가 된 다음에 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상에 떠도는 말대로, 사랑하면 용감해지거나 너그러워지거나 치사해진다. 유치해지거나 우울해지거나 의젓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변화인가가 생긴다. 몸 안에 사랑이 살기 시작한 이상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다를 뿐 아니라 사랑하기 전의 자기와도 같지 않다. 같을 수 없다. 사랑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세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 그들이 할 거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병자를 고치고 통역 없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이 믿는 위험한 진리를 증거하고 기꺼이 잡혀가고 고난당하고 목숨을 내놓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았고 이 전의 자기들과도 다르게 살았다. 사도행전은 그 이유가 그들 안에 성령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다른 존재가 우리의 내부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존재를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순간 사랑은 문득 당신 속으로 들어오고, 그러면 당신은 도리 없이 사랑을 품은 자가 된다. 사랑과 함께 사랑을 따라 사는 자가 된다. 사랑이 시키고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졌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
당신이 사랑할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사랑해도 되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사랑의 초기에 반드시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연연해할 일은 아니다. 숙주로서의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조건을 자격으로 간주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 조건이 기생체를 불렀다고 단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믿음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랑할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읽고, ]
글을 읽을 때 첫 문장이 주는 타격감은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그 뒤를 더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특히나 더 첫 문장을 주목해서 보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대체적으로 좋아하는 소설의 첫 문장을 따로 기억해두기도 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쓰메 소세키) 의 첫 문장, 이 몸은 고양이로다. 이름은 아직 없다.
<변신>(프란츠 카프카)의 첫 문장,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엄청나게 큰 갑충으로 변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댈러웨이 부인>(버지니아 울프)의 첫 문장, 꽃은 자신이 직접 사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첫 문장, 국격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이방인>(알베르 카뮈)의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면도날>(서머싯 몸)의 첫 문장,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의 첫 문장, 부끄러움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첫 문장을 따로 포스팅을 해야 할 정도로 좋아하는 첫 문장이 많은 편이다.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보게 된 아주 커다란 이유도 그의 첫 문장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에 대해 분석하는 책과 작가들은 여태 아주 많았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초상부터,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알랭 드 보통에 이르기까지. 한국 작가들도 사랑에 대한 단상들을 쓰거나 에세이로 쓴 작가들은 많았지만 이승우만큼이나 집약적이고 집요할 정도로 사랑에 대한 감정에 대해 고찰한 작가는 여태 내가 읽은 책 중엔 없었다.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그즈음하던 연애가 끝이 났다. 연애가 끝이 나면 뭐든 읽어야 하고, 쉼 없이 움직여야 하고, 그러다가 잠을 자려 누우면 원망과 자책이 동시에 밀려들어 우느라 잠도 못 잤었던 그 시기. 연애의 환호보다 이별의 파동이 두 세배는 컸던 내가 서점에 배치된 이승우의 신작을, 그것도 제목이 '사랑의 생애'인, 게다가 첫 문장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숙주이다.'를 보고 나는 도저히 지나 칠 수 없었다. 그게 이 책과 나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사랑의 생애'를 사전처럼 뒤적인다. 사랑할 때 느끼는 온 감정의 집합체라고 하기엔 과언일 수 있지만, 나는 나와 비슷한 감정을 찾아 읽으며 나를 다독일 때가 많다. 공기가 차가워지고 하늘은 높고, 푸르고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더 외로운 가을이 왔다. 나는 또 사랑의 생애를 펼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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