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오은은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로 "한국 시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언어유희의 미학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스스로 생장한 언어의 힘으로 새로운 시적 규율을 만들어가는 시인", "언어가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과 가치를 의심하고 질문하게 한다"는 평을 받으며, 한국 시의 또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매김한 그가 4년 만에 58편의 시를 썼다. 바로,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이에 시인 김언은 '어떤 다어도 고독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 단어 하나도 예사로 넘기지 않는 그 손길이 앞으로 어떤 단어를 더 건드리고 사랑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단어는 많고 단어를 사랑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한한 시간을 가장 무한하게 보내는 방식으로 누군가는 다시 고독하게 단어를 건드릴 것이다. 그보다 더 지독하게 발생하는 말 사태를 끝난 듯이 끝난 듯이 다시 보여줄 것이다.'라고 평했다.
[시인의 말]
어떤 날에는 손바닥에 그려진 실금들 중 하나를 골라 무작정 따라가고 싶었다. 동요하고 싶었다. 가장 가벼운 낱말들 만으로 가장 무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 그 반대도 상관 없었다. 낱말의 무게를 잴 수 있는 거울을 갖고 싶었다. 어떤 날에는 알록달록한 낱말들로 무채색의 시를 쓰는 꿈을 꿨다. 그림자처럼 평면 위에서 입체적으로 움직이고 싶었다. 한동안 내가 몰두한 건 이런 것들이었다. 입 벌리는 일을 조금 줄이고, 귀 기울이는 일을 조금 늘렸다. 귀를 벌리면 나비 떼, 입을 기울이면 나이테. 터지고 있었다. 아무것이, 아무것도, 아무것이나.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동요하는 어떤 낱말이. 그러고도 한번 더 동요하는 어떤 마음이.
돌아오는 길에는,
의레 영혼을 삶는 장면을 상상한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답다.
-2013년 봄의 어떤 날, 오은
[본문 중]
<마음들>
어느 날 너는 선물을 하나 사 갖고 오지. 네가 고르고 내가 값을 치렀지만 정작 너 자신도 잘 모르는 어떤 것. 풀어 볼 때까지 너를 달아오르게 하는 물건. 드레스는 자꾸 가슴을 죄어들고 너는 '자꾸'보다 더 빈번하게 침을 삼키지. 대체 너는 뭐냐고, 너라는 이름의 오브제에게
묻는 동안, 너는 네가 당사자란 사실을 그만 잊고야 말지.
집에 오자마자 너는 선물을 끄른다. 너는 화들짝 놀라고 활짝 웃다가 얼굴이 그만 활활 타오른다. 너는 봄에 비해 네가 너무 초라하다고 느낀다. 네 명도는 나무보다 너무 낮고 네 채도는 나무에 비해 '너무'보다 정도가 더 낮은 편이다. 네가 거울 앞에 서서 폭풍 같은 혹평을
쏟아내는 동안, 녹색 스커트가 방바닥에 갈가리 찢어진다.
녹색 면발들 위로 먼지가 내려앉습니다. 너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주 잠깐 전까지 선물이었던 물질을 바라봅니다. 네가 과연 그 물질에게 회복할 기회를 줄까요? 그 물질이 피륙으로 거슬러올라갈 만큼의 시간을 제공할까요? 네가 창문을 열고 너의 쪼가리들을 세상에
투하하는 동안, 네 모든 세포들은 만장일치로 행복에 항복합니다, 어느날 문득
네가 마음들을 열기로 드디어 결심한 순간,
[읽고,]
이 시집을 샀을 때가 기억난다. 남해의 작은 서점에 방문했던 날, 나는 홀로여행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이 시집의 제목이 마음을 사로잡았었더랬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오은의 시들을 읽다보면 읽고 난 후의 감정이 끝나지 않는다. 그의 맺음말은 마침표로 끝날 때도 있으나 가끔 쉼표에서 끝나기도 하고 공백을 두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 편을 읽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시선과, 그가 그 이후로도 해야 할 말들과 했어야 할 말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수록된 모든 시를 읽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 걸렸다. 이 또한 앞서 말한 이유와 같다. 그가 대하는 단어에 대한 태도. 단어를 곱씹고 그와 연결되는 다른 단어와의 만남, 조우, 재회 등을 이루기 때문에 시가 증폭시키는 단어의 폭우를 좀처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어떤 시던 내 식대로 해석한다. 시인이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사실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 다만 그의 손에서 쓰여져 떨어져 나간 유성우 같은 아름다운 글들이 내 안에 들어와 다른 식으로 읽히는 것이 재밌어 시를 읽곤 한다. 특히 오은의 시가 그렇다. 분위기로 읽히는 글들, 단어들. 나는 분위기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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