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시]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hallomean 2022. 10. 6. 16:10
728x90
반응형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장석주

[책 소개]

문학동네시인서 116권.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장석주 시인의 시집이다. 등단 40주년이 넘은 시인은 전방위 글쓰기의 그 선봉에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뜨겁고 폭발적인 에너지로 일궈낸 다양한 저작들 가운데 그럼에도 수줍은 듯 그런 만큼 늘 새로운 듯 작심 끝에 꺼내 보이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건 '시'라는 장르에서의 시심이다.

그간 십여 권의 시집을 펴냈으나 유독 이번 시집에서 '청년'다움에 빠져드는 이유는 시를 향한 그만의 초심이 다시금 발휘되어서 이기도 할 테다. 총 4부에 나뉘어 담긴 이번 시집의 주제를 '사랑'이라 아니할 수 없을 터인데 그의 이즈음의 사랑이란 곧 죽음과 그 궤를 한데 하고 있기에 그 큼이 참으로 지극히 넓고도 깊음을 알게 한다.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없고 세상에 영원한 삶 또한 없는 것, 그 끝을 알고 몸을 밀어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과정만이 영원한 사랑이고 영원한 삶일 터, 이쯤 되니 그가 "살아도 살았다고 말 못 한다"라고 말하는 대목에 대한 이해가 무릎을 탁 치게 한다. 

 

[시인의 말]

1. 봄날 새벽의 노란 별자리를 보며 점을 쳤다. 큰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먹는 방에서 깨기를 바랐건만 시는 잠결의 무심한 뒤척임, 가느다란 꿈의 파동으로 왔다. 시는 우연, 빛과 소리, 날씨와 구름의 움직임에 대한 계시에 가까웠다. 내 점은 자꾸 빗나갔다.

2. 이번 시집은 작다. 작아지려고 탕약처럼 뭉근한 불로 오래 졸였다. 작은 슬픔으로 큰 슬픔에 닿기 위하여 애썼다. 덕분에 내 상상력은 뿔냉이나 엽낭게의 감정 노동만큼 조촐해졌다. 작음은 이번 시집에서 내세울 단 하나의 자랑거리다. 더 작아지지 못한 건 흠이다. 더 작아져서 큰 실패에 닿지 못했음을 후회할 거다.

-2019년  1월, 장석주

 

[본문 중]

<내륙의 운문집>

영화관과 빵집이 문 닫은

그날 저녁을 기억하지 못한다.

모란과 버드나무와 뻐꾹새를 편애함,

검은 머리 찰랑이는 미인의 쇄골을 동경함,

구옥의 견결함과 헐거워진 경첩 따위는

늘 내륙의 일로 돌아온다.

착한 것들이 가녀리게 살다 가면

기일은 망각 속에서 돌아온다.

기쁜 일은 언제나 여름 아침에 오고

개간지에 여뀌가 무리 지어 자라는데,

개를 도살한 자가 38번 국도를 타고

달아나고 가을이 진격한다.

가을의 오후에는 순면 셔츠를 입자.

착한 누이는 무릎을 꺾고

어떤 사랑은 빨리 끝난다.

애써 더 사랑한 사람이 슬프다.

 

[읽고,]

지금 계절과 어울리는 시를 본문 란에 넣었다. 사랑의 기억. 시인은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썼다. 이미 세세하게 영화관과 빵집이 문을 닫은 그날의 분위기, 함께 했던 이와의 기억을 써두곤 기억하지 못한다고 쓰는 그의 마음은 어쩐지, 내 방어기제와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반짝이는 것들을 편애하고, 내 사람의 모습을 사랑함과 동시에 동경하며 뭐든 그의 마음엔 그의 내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 순수했던 사랑의 시간이 지나면 절대 있을 리 없을 것 같은,  이별은 어느새인가 눈앞에 있다. 그에게 이별은 죽음의 이미지. 삶에서의 죽음은 어쩐지 먼 훗날의 이야기 같지만, 죽음이란 것은 어느샌가 당도해 우리의 앞에 도달하곤 한다. 내 마음, 내 사랑을 죽인 자가 떠나고 처연한 가을이 올 때. 보드랍게 감싸주는 순면 셔츠가 필요하다. 어떤 사랑은 빨리 끝난다. 어떤 삶은 빨리 끝난다. 애써 더 사랑한 사람이 슬프다. 애써 살아가려는 사람이 슬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