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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hallomean 2022. 10. 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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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단 하나의 사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녀는 알고 싶었다"

사랑으로부터 소외된 사랑을 찾아서

김소연 시인의 산문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가 '문지 에크리'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등단 이래 김소연은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가는 동시에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한 글자 사전> 등 섬세한 관찰력과 시적 감수성을 담은 산문을 꾸준히 집필해왔다. 최근에는 오롯이 '나'의 개인적 경험과 사유를 녹여낸 <나를 뺀 세상의 전부>로 삶의 소소한 기척과 소중함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러한 작가가 이버에는 자신이 아닌 외부로 시선을 돌려 '사랑'이라는 타자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김소연은 사랑을 한다는 것이 사랑을 소비하고 즐기는 것으로 치부되는 이 세계에서 사랑을 명사형이 아닌 동사형으로, 즉 '사랑함'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사랑을 하나의 개념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그것의 유동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텅 빈 사랑'에서조차 작가는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애쓴다. 오랜 세월 남성 철학자들에 의해 전유되다시피 해온 사랑에 대한 담론을 순전한 여성의 목소리로, 3인칭의 형식을 빌려 담담하되 온기 어린 필체로 써 내려간다.

그러므로 이 책이 부디 "내가 사랑에 대하여 쓸 수 있는 이야기의 아주 작은 시작이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우리는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를 통해 사랑을, 아니 사랑함의 의미를 다시 한번 성찰해보는 기회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지성사 제공 책 소개글

 

[본문 중]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

아주아주 그리운 얼굴이 있어 그녀는 연필을 잡고 그 얼굴을 그려본 적이 있다.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이 그녀에겐 전혀 없었다. 그리워만 하고 있다가 그녀도 모르게 그 얼굴을 그렸다. 연필을 잡고 턱선을 여리게 그었다. 그리고 전혀 그 얼굴이 아니어서 이내 지웠다. 다시 천천히 선을 그었다. 그러고 또다시 지웠다. 그렇게 계속 계속 그리고 지우다보니, 그녀가 쥔 연필 끝에서 그 얼굴이 정확하게 나타났다. 그런 식으로 선을 그었다 지웠다를 계속계속 반복하여 마침내 입술을 그렸고, 귀를 그렸고, 눈썹과 눈동자를 완성했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종이 앞에 앉아 있었다. 

 연필을 잡고 있는 동안에, 실패한 선들을 지우개로 지우고 지우개 가루를 호호 불어버리는 그 시간 동안에, 그녀는 그리움으로 인하여 괴롭지 않았다. 그리워만 하느라 애가 닳던 시간들은 이미 저 너머로 가 있었고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어떤 상태에서 조금 비켜나 있을 수 있었다. 실물도 없이 사진도 없이, 다만 기억만으로 그리운 얼굴을 완성할 수 있었던 그녀의 경험을 무엇이라 이름 붙이면 좋을까. (중략)

 매일매일 자기가 좋아하는 공룡 그림을 열심히 그리느라, 돌멩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수많은 이면지를 마루 한가득 늘어놓던 조카에게 다가가 그녀가 말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공룡은 이제 많이 그려서 너무너무 잘 그리니까 딴것도 그려보자. 꽃도 좋고 물고기도 좋고 다른 동물도 좋겠지, " 조카는 눈썹을 찡그리고 아랫입술을 불룩하게 내밀며 대답했다. "공룡은 만날 수가 없어서 그리는 거예요. 그리고 있으면 꼭 만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그녀는 그 종이들에서 공룡 그림들이 아니라 조카의 애절한 시간들을 읽었다. 무엇인가를 견디는 시간이었고 동시에 재회의 시간이었고 동시에 시간을 무화시키는 또 다른 층위의 시간이었다. 

 

[읽은 후,]

사랑 이후에 오는 것들, 사랑에 관한 것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라고. 너무나 많은 의미의 총체라고 머리는 알고 있지만 막상 사랑에 빠진 우리는 그 안에서 허우적거림을 멈출 수 없다. 자꾸만 감정에 잠식하는 나 자신과 나를 숨막히도록 짓누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실체는 견디기 힘듦과 동시에 영원히 그 짓눌림이 계속되길 바라는 이중적인 상태가 지속된다. 사랑을 하며 기가 막히도록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있었나 싶다가도 그 사랑이 끝이 나면 그 순간들이 너무 많이 기억에 남아 떠올려지면 순간순간 괴롭기 마련이다. 그 시간마저 지나면 다시 이성이 돌아와, 사랑은 그저 수많은 의미들의 총체일 뿐이다, 많은 의미부여를 하지 말자고 되뇌이지만 사랑에 빠지면 다시 고통의 무한루프에 빠진다. 이 책에선 타인의 사랑이야기가 쓰여있음에 분명하지만 나의 사랑이야기가 쓰여있다. 내가 끄적여 논 과거를 찬찬히 읽어 넘기는 기분.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안엔 내가 있다. 사랑을 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과거와 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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